창시자
극진공수도(가라데) 창시자
최영의(崔永宜, 일본명 大山倍達)(별칭 : 최배달, 崔倍達)(1923~1994)
1923년 전라북도 김제에서 태어나 어린시절부터 무도에 관심이 많아 꾸준히 무술을 연마하고 신체를 단련했다.
그가 16살이 되던 해 홀로 일본으로 건너가 산이소년항공학교(山梨少年航空學校)에 입학하고 이때 처음으로 공수도를 접하게 되었다. 1945년 8월 동경에 공수도연구소를 창설하여 공수도 연구를 시작했다. 1946년 4월에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체육과에 입학하였고, 여기서 재일조선인 민족운동가이자 무술가인 조영주(전민단단장)선생과 야마구치 고겐선생에게 강유류(剛柔流)를 사사받고 후나고시 키친선생에게 송도관(松濤館) 공수도를 1년간 수련 받아 1단을 수여받게 된다.
이후 조영주의 권유로 1차 입산수련을 실시했고, 이 때 읽은 오륜서(五輪書)는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47년 9월 그는 전일본 공수도 선수권대회에 출전해 우승하며 세상에 그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23세에 그는 현재의 공수도계의 비실전적인 시스템에 실망하여, 지난 3년 동안의 수면 시간만큼 수련을 하겠다는 야망으로 입산수도를 결심한다. 입산수도 기간 동안, 그는 주변의 나무들이 시들어 죽을 만큼 산 나무들을 치며 단련을 거듭 하였다. 이토록 고된 수련과 얼음 폭포 아래에서 명상하는 등의 수련을 쌓고 하산한 뒤 일본 전역의 수많은 고수들을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청하고 대련에서 승리했고 자신만의 실전지향적인 공수도 스타일을 확립해나갔다.
하지만 이를 시기한 이들의 공격에 매일 밤 숙소에 돌이 날아들었고, 습격에 대비해 하루에도 몇 번씩 숙소를 옮겨야만 했다. 최배달은 온통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공수도를 증명하기 위해 대결들을 멈추지 않았다. 고베의 면도날이라 불리던 모리, 나고야의 닌자 미와, 검귀를 비롯한 수많은 대결을 벌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의 대결은 일본에만 국한되지 않고 세계를 돌며 사바트, 권투, 무에타이, 레슬링, 카포에라, 쿵푸 등 수많은 무도의 고수들과 100번이 넘는 대결을 펼쳤다. 톰 라이스(미국 레슬러, 1954년), 보몬(프랑스 사바트 고수), 무이슈킨(무체급 레슬러) 등이 그 대표적 상대로 손꼽힌다. 평생 동안 무패의 신화를 쌓아올렸다. 1950년에는 47마리의 소와 대결해 승리하며 용맹을 떨쳤다.
그는 동경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대산도장(大山道場)을 개설했고, 강해지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정립한 실전 공수도를 통해 자신의 제자들을 강하게 단련시켰다. 그의 도장은 일본뿐만 아니라 전세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1958년에는 영문으로 된 가라데의 지도서인 ‘What is Karate’를 출판하고 하와이에 지부를 개설했으며, 워싱턴 FBI본부와 미국육군사관학교(West Point)에서 자신의 공수도를 지도했다. 1959년 7월 하와이에서 제1회 하와이공수도선수권대회를 개최했고, 1960년 미국과 유럽 등 16개국에 72개 지부도장을 발족시켰다. 그리고 1961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L·A에 도장을 개설하고, 하와이에서 제1회 북미공수도선수권대회를 개최했다. 1965년 캐나다지부, 1966년 북미연맹과 남미연맹, 1968년 유럽연맹, 중근동(中近東)연맹, 남태평양연맹, 1969년 남아프리카연맹, 동남아시아연맹 등 조직을 확대했다.
이렇게 그의 도장은 전세계로 퍼져나가 1969년 9월에는 제1회 전일본 공수도선수권대회에세계 각국의 수많은 선수들이 모여들었고 성공적으로 대회를 개최했고 현재까지도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1964년 ‘대산도장’은 극진공수도의 심장이 되었으며, 사망 시점에는 133개의 국가에 1,200만명의 수련생을 보유 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 그의 제자들이 그의 유지를 받들어 지금까지도 그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이렇게 그의 도장은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당시 한국의 정치상황으로 인해 돌아갈 수 없는 조국인 대한민국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 항상 자리하고 있었다. 이는 여러 가지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 먼저 자신의 이름을 대산배달(오야마 마쓰다쓰, 大山倍達)로 지었는데, 이는 우리 역사상 최초 나라, 또는 우리 민족을 지칭하는 배달(倍達)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의 둘째 아들인 최광수씨는 아버지인 최영의총재가 자신을 ‘조선에 뿌리를 둔 국제인’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던 사실을 증언했다. 일본총리의 귀화 권유가 있었고 일본에서의 활동을 위해 실제로 일본국적을 획득했지만 그는 이 일을 귀화가 아닌 단순한 일본국적취득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는 늘 자신이 조선인이라고 밝혔다는 일화 등을 통해 그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준다.
그는 "지금 싸우고 있는 적이 마지막 적이다. 싸움은 이번 한번뿐이라고 생각하라. 목숨을 건 싸움에서 이번엔 지지만 다음엔 이긴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이번에 지면 다음 은 없다. 이미 그대는 적에게 죽었기 때문이다"
“실천이 없으면 증명이 없고, 증명이 없으면 신용이 없으며, 신용이 없으면 존경이 없다”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고 힘없는 정의는 무능이다”
“돈을 잃는 것은 작은 일이다. 신용을 잃어버리는 것은 큰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용기를 잃어버리는 것은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뜻이다”
“머리는 낮게, 눈은 높게, 입은 좁게, 마음은 넓게 하며, 효(孝)를 원점으로 삼아 타인을 이롭게 한다”는 말을 남겼다.
폐암 선고를 받고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도 진정한 정권의 의미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는 일화를 통해 그가 진정한 무도를 지향했다는 사실을 깊이 느낄 수 있다.
참고자료
『私の空手道人生』(大山倍達, 講談社, 1973)
『空手極限の世界』(大山倍達, 朝日出版社, 1984)
『極眞カラテ94』(大仙倍達, パ-ワ空手出版社, 1994)
[네이버 지식백과] 최영의 [崔永宜] - 극진 가라테를 창시한 진정한 무도인 (인물한국사)
[네이버 지식백과] 최영의 [崔永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